" 남의 나라 전쟁 이야기 "
인류가 지구상에 자리 잡고서부터의 역사,예컨대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철기시대의 고대사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씨족,부족간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인류가 있는 곳에선 언제나 나름대로의 세력패창과 집단 이익을 위한 전쟁이 어떤 명분으로든 집권자의 치국수단으로 이어져 왔고,이와 같은 전쟁의 기록들이 세계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며 오늘날까지도 규모만 다를뿐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어느 시대이건 호전적인 지도자가 당시의 주변정세를 그릇 판단함으로 인해 순진한 백성들을 전장으로 몰고가 패하게 될 때,그 나라 국민들은 참혹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으며,얼마나 혹독한 시련에 봉착하게 되는가의 사례를 알아봄으로써, 글로벌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사료되어, 먼 나라 이야기지만 우리 회원들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파라과이 대 삼국동맹전쟁이 주는 교훈'
면적은 한반도의 2배, 인구는 500만이 채 안 되는 남미의 파라과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는 아니다. 그런데 1996년 4월 봄바람과 함께 와시모시 대통령이 이끄는 시민정부가 오비에도 장군이 장악한 군부에 맞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군부의 노골적인 정치 개입과 쿠데타 위협을 국민의 힘으로 막아낸 것이다.
모처럼 파라과이로부터 전해진 싱그런 소식이었다. 이어 6월에는 해외토픽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파라과이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챠꼬 주에서 보물찾기 붐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정복자의 학살을 피해 도주하면서 파묻어 놓은 보물이라는 설명이었는데, 언뜻 듣기에는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 당시 얘기 같았지만 아마도 ‘삼국동맹전쟁’ 시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인 듯했다.
삼국동맹전쟁은 1864년부터 6년간에 걸쳐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국의 연합군과 파라과이가 싸운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유혈전쟁이었다. 얼핏 보면 이 역시 말이 안되는 싸움이다. 인구와 면적에 있어서 대략 남미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라질과 스페인어권에서 남미 최강의 국가인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연합하여 그 자그마한 나라 파라과이를 아예 없애버릴 작정이었을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부터 130년 전의 파라과이는 남미 최강의 국가 중 하나였다. 물론 인구는 적었지만 남미에서 가장 공업화 된 국가 중 하나였고, 외국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철도를 놓고 공장을 가동시킨 나라였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 이론에 근거해 자유무역을 주장한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에서 경제를 장악하고 있을 때, 파라과이는 보호부역을 내세워 착실하게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발발의 표면적 이유는 독재통치를 했던 로뻬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개인적 야욕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로뻬스 파라과이 대통령은 스스로를 ‘남미의 나폴레옹 3세’로 자칭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라과이를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로 만들려고 했다. 이는 이웃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내면적 원인은 파라과이의 경제발전과 성장이 영국의 이 지역 지배에 방해가 된다는 점에 있었다. 영국으로서는 파라과이가 이 지역에서 경쟁상대로 떠오르기 전에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완충지대격인 우루과이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독립한 우루과이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브라질은 우루과이의 내정에 간섭하여 꼴로라도당을 지원했다. 결국 이런 우루과이에 대한 내정 간섭이 양국의 전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에 브라질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아르헨티나가 브라질과 연합하여 파라과이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브라질의 지원을 받았던 꼴로라도당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루과이도 이 선전포고에 동참했다.
전쟁은 세 나라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파라과이가 자국 영토 안에서 방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1868년 12월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이 함락되었음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6년간의 잔인했던 전쟁은 1870년 로뻬스 대통령이 전사함으로써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예상을 넘어 6년간이나 지속된 이 전쟁을 통해 승전국인 부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는 국가통일을 공고히 할 수 있었으며,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승리의 대가로 파라과이 영토의 일부를 자국에 병합했다. 그러나 패전의 결과는 파라과이에게 너무나 참혹한 것이었다. 한반도만한 영토(15만5400제곱킬로미터)를 빼앗겼으며, 패전에 따른 과중한 보상금(1900만 페소)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는 인구 손실이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6년간의 전쟁을 통해 12세에서 60세에 이르는 파라과이 남성은 거의 다 죽었다. 전쟁 전 파라과이는 52만5000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전쟁이 끝났을 때 인구는 22만 명뿐이었다. 전체 인구의 60퍼센트가 죽은 것이다. 그나마 생존자 22만명 중 남자는 겨우 2만800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대다수가 60이 넘은 노인이거나 어린아이였다. 이런 상황이니 전쟁이 끝난 후, 불법이긴 했지만 사실상 일부다처가 허용될 수밖에 없었다. 남녀의 성비가 1대9였으니, 아마 전설상 여인국인 아마조네스를 제외하고는 세계사에 그런 나라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라과이를 완전히 페허로 만든 원인 제공자 로뻬스 대통령은 지금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강대국들의 사주에 저항하여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운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로뻬스 개인의 욕망에 의한 것이었든 외국의 사주에 저항을 한 것이었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이후 파라과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돌아볼 때 이 땅에서는 어떤 형태이든 전쟁이 재발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힘을 기르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참 진리이겠지요 !